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= 사도세자 사망 이후 ==== [[1769년]](영조 45년), [[정조(조선)|세손 산]]은 흥은부위(興恩副尉) 정재화(鄭在和)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[[화완옹주]], [[홍국영]] 등이 각각 목격했다. 이는 [[화완옹주]], [[홍국영]]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직접 알렸고,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[[홍봉한]]을 찾아가 [[정조(조선)|어린 세손]]이 [[사도세자]]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. [[홍봉한]]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,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. [[홍봉한]]이 나서서 [[정조(조선)|세손]]을 보았던 [[기생]]들을 [[유배]]보내고 [[정조(조선)|세손]]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. 이는 《[[조선왕조실록]]》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, 혜경궁 홍씨의 《[[한중록]]》에 직접 언급되었다. [* 당시 궁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세손과 세손빈의 부부사이가 서로 얼굴을 상면하지 않으려 할만큼 좋지가 못했다. 이것에 대해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주장한대로 화완옹주가 개입한것인지는 불명] [[1775년]](영조 51년), [[영조]]가 [[정조(조선)|세손]]에게 [[대리청정]]을 명하자 혜빈의 작은아버지였던 [[홍인한]]은 극력 반대하였고, 이 문제로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미움을 사서 [[정조(조선)|정조]] 즉위 이후 [[유배]]되어 사사된다. [[홍봉한]]은 [[1770년]](영조 46년) 경 반대파 [[김귀주]], [[정후겸]]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[[홍인한]]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[[홍봉한|형]]을 배신했다고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말한적이 있다. [[사도세자]] 생전부터 있었던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 [[경주 김씨|외척 가문]]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[[김귀주]] 정파의 [[홍봉한]] [[탄핵]]이 여러번 있었으며 [[정조(조선)|정조]] 즉위초에도,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[[죽음|승하]] 이후에도 이들이 [[홍봉한]]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. [[사도세자]]의 [[추존|추숭]]에 대해 당시 [[왕세손|세손]]이던 [[정조(조선)|정조]]와 사석에서 [[홍봉한]]이 나눈 이야기를 [[김귀주]]가 [[영조]]에게 고자질해서 [[홍봉한]]을 [[역적]]으로 몰기도 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